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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여전히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놓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 구절을 묵상하게 하셨습니다. 제가 지난 호 사설(“사랑은 구원의 문제인가?,” 2023년 9월)에서 이 구절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독자들로부터 흥미로운 반응이 있었는데, 제가 이 구절을 깊이 파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의 공통 관심사는 제가 사랑의 행위를 통한 구원 신학을 제시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믿음, 사랑, 구원이 어떻게 서로 작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제가 가진 반듯한 신학적 범주에 도전을 가했습니다. 제가 9월호 사설 제목을 질문형으로 쓴 것은 저의 해석학적 결론에 대해 스스로 완전히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쓴 다른 많은 사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저는 높은 분들의 권위있는 말이 아닌, 고군분투하는 동료 그리스도인의 솔직한 탐구를 제시한 것입니다. 저는 제가 글을 쓰는 모든 사안에 대해 최종 결정권을 가진 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제 마음에 주신 것과 제가 발견하도록 은혜 주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는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다른 사설에서 조언한 바처럼 저는 성경을 제가 가진 신학적 안전 지대에 맞춰 길들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 자체의 의미로 읽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성경을 길들이는 징후,” 2021년 11월). 성경의 비유를 제가 가진 신학적 렌즈로 쉽게 해석하고 이미 정해진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입견을 내려 놓고 본문이 말하는 바를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파악하며 정직하게 본문과 씨름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우리가 “구원하는 신앙”에 대해서 말하는 것만큼 예수님도 “구원하는 사랑”의 개념을 가지고 계실지 모릅니다. 성령님이 이 두 가지 모두의 궁극적 근원이신데, 두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까? 최근 작고한 개혁주의 신학자 R.C. 스프롤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추측 혹은 지식, 그도 아니면 단순한 지적 동의에 불과하다. 진정한 신앙의 열매는 언제나 사랑이다.” (하나님의 목적, 1994년, 37쪽) 우리 중 대부분은 사랑의 언어가 신앙의 열매라는 것에 더 익숙할 것입니다. 신앙이 먼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반듯하게 정돈된 신학적 체계에 더 잘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딱 떨어지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내온 어떤 분은 신앙과 사랑의 상호 연결성을 이해하셨습니다. 어느 한 분은 야고보서 2장 26절 “(사랑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를 인용하며 사랑이 진실로 구원의 문제라고 확증했습니다. (저스틴 베일리의 “신앙에 관한 큰 질문”의 xx 쪽을 또한 참고하십시오).

저는 사랑이 구원의 문제인지 질문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것이 사랑 없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라는 스프롤의 경고를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적으로 바르게 믿는 것이 구원의 문제인 것처럼 행동하고 반응합니다. 옳은 교리를 붙들며 종종 지적으로 축소되곤 함에도 말입니다. 어쩌면 성령님이 제 마음 속에 주신 질문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넌지시 신호를 보내려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신앙의 다른 부분에 해가 될 정도로 신앙의 지적인 부분을 격상시켰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성경적인 균형을 찾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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