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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님이 이 예화에서 구원을 위한 핵심으로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사랑을 강조하는 선택을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5-37)는 우리에게 늘 도전이 됩니다. 복음서 기자인 누가는 율법교사의 질문과 함께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을 소개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다시 말해서 구원받기 위해서 그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순간이야 말로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구원을 가르치기 위한 가장 좋은 상황 같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예수님은 다른 질문으로 답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구약 율법 전문가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율법전문가가 말하고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28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확증하십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예수님이 이 예화에서 구원을 위한 핵심으로 신앙이나 믿음이 아닌 사랑을 강조하는 선택을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물론 신앙과 사랑이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는 완벽한 설정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이 올바르게 믿는 것(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셨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러자 율법 교사는 사랑의 경계를 찾고자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묻습니다. 아마도 그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마5:43)는 잘 알려진 속담 같은 대답을 예상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미워해도 되는 대상을 확인 받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대답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자비와 긍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 이웃이며 ‘정당하게’ 미워해도 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아가 미움 받고, 불순하며, 이단신앙을 가진 사마리아인을 영웅이자 이웃을 사랑하는 모델로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보였기 때문에 영생을 받았음을 암시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이 한 것처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시며 끝맺으십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청중들에게 이것이 충격적인 함의를 가진 이유는 거리의 피해자를 돕는 대신 정결을 위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고 지키기로 선택한 존경 받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영생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바란 것도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누가가 이 이야기의 틀을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잡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을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유일하게 기록한 복음서 기자인 누가는 우리가 하늘의 아버지께서 자비가 풍성하신 것처럼(눅 6:36) 우리도 자비가 풍성해야 한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웃에게, 심지어 적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은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의 문제입니다.

최근에 위대한 중세 신학자 성 어거스틴의 글을 읽고 도전을 받았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거룩한 성경을 일부분이라도 이해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갑절로 커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 On Christian Teaching, “관대한 글쓰기: 말로 덕을 쌓는 것”에서 인용, 79쪽).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증진을 좋은 성경 해석의 증표로 보았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행하는 것을 배우고자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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