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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를 가장 큰 계명으로 꼽으신 이유입니다(마 22:37-40).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해야 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필요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방법임을 가르쳐 줍니다.

가끔 이타주의나 친절이 자기애의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자기자랑이나 하나님의 칭찬을 얻기 위해 타인을 사랑할 수도 있으며, 이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랑의 진정성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진정으로 큰 사랑의 대가를 치렀습니다. 길에서 다친 이를 돕기 위해 자신의 여행을 멈추고, 자신의 시간을 들여 계획을 바꿨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들을 사용해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며 정성을 쏟았고, 다친 이를 나귀에 태우고 자신은 걸어갔습니다. 여관에서 그를 하루 동안 돌보고, 당시 이틀치 임금에 해당하는 두 데나리온을 지불했습니다. (IVP 신학주석에 따르면) 당시 평균 여관 요금이 약 1/12 데나리온 이었던 것을 고려할 때, 이는 약 3주 반 가량 숙박할 수 있는 큰 금액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여관주인에게 추가비용이 발생하면 모두 변상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 약속이 내포한 큰 위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빚을 갚지 못하면 채무자가 노예로 팔리거나 감옥에 갇힐 수 있었습니다. (마18:22-35 참조) 그러므로 사마리아인이 추가비용을 모두 갚겠다고 약속한 것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사마리아인에게 적대적이고 그들을 경멸하는 지역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전 장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마리아 마을을 파괴하기 위해 하늘에서 불을 내리자고 말했습니다(눅9:51-56). 이런 상황에서 사마리아인은 반쯤 죽은 유대인을 유대인 마을로 데려가기 위해 죽거나 다칠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다친 유대인의 부상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짐 크로우법 시대에 흑인 남성이 반쯤 죽은 백인 남성을 데리고 미국 남부의 백인 마을로 데려 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흑인 남성들은 훨씬 더 사소한 경우로도 린치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값비싼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이웃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것을 베푸는 데 있어 어떤 대가도, 희생도, 심지어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안전하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온라인 상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거나 그들의 신학을 바로잡으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보수적인 연민” (p.10 참조)기사에서는 훨씬 나은 사랑의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는 또한 같은 기독교인에게 상처받거나 심지어 트라우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을 베풀려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것이 바로 값비싼 사랑입니다. 저는 그러한 사랑 앞에 많이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값비싼 사랑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값비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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